아마 소파 방정환(方定煥)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요,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의 인권 신장과 교육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또한,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작가이자 출판인이었으며 독립운동가였는데요, 오늘은 다가오는 어린이날을 맞아 소파 방정환 선생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정환 선생에 대한 정보라면, ‘어린이란 존칭어를 만들고, 아동 인권보호에 앞장선 사람’인데요, 나아가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사람’, ‘어린이 연구단체 색동회를 창립하고,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사람’,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등등 주로 ‘어린이’와 연관된 키워드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어린이’에 관심을 갖고, ‘어린이날’까지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한 명 있으니, 바로 손병희 선생입니다. 천도교 3대 교주이자 3.1 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활약한 손병희 선생은 그의 장인인데요, 방정환 선생 역시 3.1 독립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석방됩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데, 이곳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조선의 철학은 ‘유교’였고, 삼강오륜을 기본 덕목으로 내세웠는데요, 그 중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덕목으로, 사회 전반에 아이들을 괄시하고 천대하던 문화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문화를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어린이 연구단체 ‘색동회’를 만들고, 어린이날을 제정했습니다.

 

 

 

 


‘어린이날’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어린이날이 공식으로 지정된 1923년 5월 1일, 어린이들은 길거리에 12만 장의 전단을 뿌렸는데요, 이는 ‘세계 최초의 아동 인권선언’이었습니다. 1924년 국제연맹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발표한 ‘아동 권리선언’보다 앞선 것이죠. 어린이 권리공약 3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린이를 종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적 대우를 허용하고,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연소노동을 금지하며,

어린이가 배우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시설을 보장할 것’

 

 

 

당시 시대상을 살펴본다면 가히 혁명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아이들의 인격과 인권이 무시당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의 인격을 보장하고, 노동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 한국잡지백년2>


방정환 선생이 최초의 월간 아동잡지 「어린이」를 펴낸 건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2만 명인데, 10만 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한 이 잡지는 방정환이란 출판인의 한 단면만 보여줬을 뿐입니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신청년」이라는 문예지를 창간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잡지 「녹성」,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성」을 창간한 것은 물론, 중학생 잡지 「학생」의 편집인과 주필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이처럼 이름 앞에 ‘최초’, ‘처음’이라 붙은 잡지를 다수 창간한, 능력 있는 출판인이었는데요, 그의 재능은 기획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동요, 동화극, 동화, 번안동화, 논문, 탐사기, 수필 등 800편에 이르는 글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양’의 글을 기고하면서 몇 개의 필명을 사용했는데요, 「어린이」에서 유머칼럼을 쓸 때는 ‘깔깔박사’, 탐정소설을 쓸 때는 ‘북극성’, 외국 동화를 번역할 때는 ‘몽중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한편으로 어린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손이 글을 뽑아냈다면,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도 했습니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는데요, 그의 동화구연장은 어린이들로 넘쳐났습니다. 매년 70회, 통산 1천 회 이상의 동화구연을 했는데, 그가 이야기하면 때론 웃음바다가 되고, 때론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맛깔나게 이야기를 했는지, 감옥에 갇혔을 때 이야기를 듣던 죄수들이 그를 못 나가게 막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발 월급쟁이나 시어미 있는 데는 연애 아니라 아무거래도 가지를 말아요. 사람이 썩어요 썩어!” 그가 쓴 「여학생과 결혼하면」이란 글의 한 대목입니다. 일제 강점기 남성이 여성의 시선으로 쓴 글이죠.

 

그는 양성평등을 말한 여성주의자였습니다.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서나간 게 아닐까요? 하긴 ‘어린이’란 말을 만들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아동 인권에 주목하고, 아동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온몸을 내던진 걸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가 손병희 선생의 사위이고, 천도교 신자란 점에 다시 주목해 봅시다. 천도교는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3대 교주인 손병희는 인내천(人乃天)을 전면에 내세웠는데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란 뜻은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될 수 있고,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입니다. 신분제 사회의 끄트머리, 그리고 형식적으로 신분제 사회를 갓 벗어난 구한말,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런 생각을 주장했다는 건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천도교인이었고, 진보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몸소 실천에 옮겼습니다.

 

하지만 '천재는 박명이다'라는 말이 있죠? 이처럼 재능과 열정이 충만했던 방정환 선생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바로 ‘수명’이었습니다. 그는 불과 33세라는 너무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이 짧은 시간 동안 이뤄놓은 수많은 업적을 생각한다면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원래 어린이날은 5월 5일이 아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대한민국 최초의 어린이날, 당시 소년일 기념식은 1922년 5월 1일에 열렸습니다. 이후 어린이날은 노동절과 겹친다는 이유로 5월 첫째 일요일로 옮겨졌다가 일본의 탄압 때문에 중단됐는데요, 어린이날이 다시 부활한 건 광복 이후입니다. 이때부터 어린이날이 5월 5일로 지정되었고, 공휴일로 지정된 건 1975년입니다.

 

 

 

지금까지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어린이에게서 민족의 미래를 발견하고,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날'을 제정한 소파 방정환 선생에 대해 알려드렸는데요, 다가오는 어린이날에는 우리 미래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이 아무 걱정도 없이 밝게 웃을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by 대교 2017.05.04 09:00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