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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역사

쉽게 알아 보는 역사 공부, ‘역모로 시작된 영조의 탕평책’




‘이인좌의 난’이라는 생소한 소재로 최근 <역모-반란의 시대>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어요. 많은 사람이 영조가 조선 왕조 최장 재위를 기록한 탕평 군주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의외로 그가 집권한 초기에 나라를 뒤흔든 대반란 사건이 일어난 사실은 잘 모르는데요. 그렇다면 이인좌의 난은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오늘은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해요. ^^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1724년, 경종 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입니다.”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하략)


- 조선왕조실록 영조 31년(1755년) 5월 20일의 기록 중 발췌



이 기록은 영조의 삶 자체를 뒤흔든 결정타라 할 만한 사건이라 할 수 있어요. 여기서 '갑진년'은 영조 즉위년인 1724년을 말해요. 사건 전모는 이러해요. 소론 강경파인 준론의 후예들이 과거 시험 답안지에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내용의 글을 쓴 것이에요. 죽음을 각오하고 영조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죠. 영조는 즉각 이들을 잡아들여 국문을 열었는데요, 이때 신치운이 말한 것이 “갑진년 이후로 게장을 먹지 않았다”는 발언이에요. 경종은 영조가 진상한 게장과 생감을 먹은 뒤 쓰러졌는데, 두 음식은 함께 먹으면 복통을 유발하는 등 상극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이후 소론 계열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품었고, 얼마 후 이를 기정사실로 여겼답니다.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무신란)’은 영조에게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전제 하에 소론이 일으킨 반란이에요. 영조로서는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위태해진 사건이었죠.




 

<이인좌의 난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역모-반란의 시대'의 한 장면 (출처 : 네이버영화)>

 


왕이 된 영조는 탕평을 내세우며 경종 시절 실각한 노론 세력을 복권시켰어요. 그리고 소론 강경파 준론을 숙청하고 소론 탕평파 완론 정권을 내세우는데, 이게 바로 정미환국이랍니다. 이에 소론 준론이 들고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이인좌의 난’은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반란군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동시에 군사를 일으켰어요. 초반 기세는 맹렬했는데요, 이인좌는 청주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경기도로 진군했고, 영남과 호남에서도 대규모 병사가 일어났어요. 이뿐만이 아니었어요. 평안도 관찰사 이사성이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고, 한양에서는 총융사 김중기, 포도대장 남태징 등이 내응하기로 계획돼 있었기에 영조 행정부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렸답니다. 그러나 호남 거병은 전라감사 정사효의 배신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붕괴했고, 한양에서 내응하기로 한 김중기, 남태징 역시 체포되면서 서울 북쪽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사라졌답니다.


그나마 이름값을 한 건 반란 총대장 이인좌와 영남 지방의 정희량이었어요. 이인좌는 초반 청주성 함락 이후 경기도 안성까지 진출했는데요, 정희량의 영남군은 영남 대부분을 점령했고 그 수가 7만 명에 이르렀어요. 그러나 관군이 충청도와 전라도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을 막아서는 통에 다른 반란군과 연계할 수 없게 됐고, 결국 경상도에서 항전했어요. 후에 이인좌는 안성에서 토벌군에게 격퇴당하고, 자신은 사로잡혔는데요, 이렇게 단 한 번의 패전은 반란 실패로 이어졌답니다.


이는 당시 반란군의 구성 때문이었어요. 당시 반란군은 대단한 군세를 자랑했지만, 사실 돈을 주고 산 용병이나 관군을 회유해 가담시킨 이들이 많았어요. 즉, 신념이나 사상보다는 이권에 얽혀 있었기에 패전 한 번으로 쉽게 기세가 꺾이고 만 것이에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뒤 영조가 보인 행보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어요. 반란의 수장 이인좌를 포함한 연루자들은 처벌했지만, 이후 소론에 매우 관대한 정책을 펼친 것이에요.


탕평을 주장한 영조에게 노론과 소론은 어깃장을 놓았어요. 타협점이 보이지 않는 반목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와 민진원을 불러 직접 화해를 주선했어요. 당시 영조는 이들의 손을 억지로 끌어내 악수를 시켰고, 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져요. 이후에도 영조는 지속적으로 탕평을 주창하며 노론과 소론의 영수들을 불러 화합을 이야기했어요. 이것이 영조 최대의 치적 중 하나로 평가하는 탕평책의 시작이랍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에 배신감을 느꼈지만, 자신도 살고 나라도 살릴 비책으로 탕평책을 주장했어요. 이인좌의 난이 없었다면 아마 영조의 탕평책도 시행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