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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금요일에 떠나요

슬픈 역사를 품은 아름다운 궁전, 덕수궁 둘러보기




오늘은 전통적인 우리 궁궐 양식과 동시에 서양식 건축물이 혼재된 덕수궁을 둘러보려 해요. 덕수궁은 구한말 격동기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궁궐인데요, 그럼 지금부터 함께 덕수궁으로 향하는 시간 여행을 떠나보도록 해요. ^^


 

 


  

 


덕수궁은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궁궐로 원래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지만,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를 한 뒤 이 곳에 살자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했어요. 덕수궁은 본래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이 있던 곳이었으나, 그 능은 태종 때 현재의 정릉동으로 옮겨졌고 능이 옮겨진 자리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 들어섰어요.


이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갔다가 1593년 다시 수도로 돌아오니 경복궁은 불에 타 전소되었고, 마땅히 거처할 왕궁이 없자 왕실의 개인 저택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이때 규모가 좁아 인근에 있던 계림군과 신하인 심의겸의 저택을 합해 궁내로 편입시키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부른 것이 후일 덕수궁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선조는 이곳에서 승하하였고, 광해군은 행궁의 서청(오늘날의 즉조당)에서 즉위했어요. 이후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이 행궁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게 했어요. 그리고 후에 순종 대에 이르러 덕수궁으로 명명되었답니다.


이렇게 임시 거처로 시작된 왕궁이었기에 경운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규모를 제대로 갖춘 궁궐은 아니었어요. 그러던 중, 경운궁은 고종이 말년에 이곳을 거처로 옮기면서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건물의 배치도 이때 자리를 잡게 되었답니다. 또, 고종 말년을 전후하여 궁내에 많은 건물이 지어졌고 일부는 서양식 건축물이 지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 역시 잠시였을 뿐, 고종이 승하한 후 덕수궁은 일제에 의해 빠르게 축소되고 해체되었답니다. 때문에 현재의 덕수궁은 고종 당시의 궁궐 면모에는 크게 미치지 못해요. 하지만 근대사의 자취를 품은 덕수궁은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과 아름다운 산책로로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어요.


덕수궁을 찾기 전, 이와 같은 전체적인 궁의 역사를 아이에게 알려주고 건물을 하나하나 살펴본다면 더욱 좋을 것 같아요. ^^







지하철 : 시청역 1호선 (2번 출구), 2호선 (12번 출구) 덕수궁 방면
버스 : 103, 150, 401, 402, 406, 1711, 7016, 7022, 6005, 90S투어, 91S투어


* 덕수궁에는 주차시설이 없으니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 방문해주시길 바라요!





매표 및 입장 시간 : 09:00 ~ 20:00

관람 시간 : 09:00 ~ 21:00






 







그럼 제일 먼저 덕수궁의 중심 건물인 중화전을 살펴볼게요.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은 중화문을 거쳐 들어가면 만나볼 수 있어요. 중화문은 덕수궁의 중문으로 1902년에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 때 불에 탔던 것을 1906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원래 중화문은 처음에는 중층 건물로 지었으나 중화전이 축소되어 다시 지어지면서 함께 단층으로 지어졌답니다.





사진 속의 건물이 바로 중화전이에요. 조선은 1897년, '황제국'인 대한제국으로 체제를 바꾸게 되었는데요, 이때 덕수궁 또한 그 위상에 맞게 확장되었어요. 그리고 1902년에는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이 완공되었어요. 당시의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위상을 보이기 위해 외관을 황금색으로 장식했다고 해요.

 




하지만 1904년 덕수궁에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중화전은 불에 타버렸고, 이후 1906년 곧바로 복원되긴 했으나 단층의 지붕 규모로 축소되고 말았어요. 이는 제국 정부가 재정난에 시달렸기 때문인데요, 때문에 중층인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에 비해 덕수궁의 중화전은 그 규모가 다소 작은 편이에요.







다음으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즉조당이에요. 앞서 임진왜란 당시 월산대군의 저택을 행궁으로 삼았다고 이야기를 해드린 적이 있는데요, 왕실 사람들은 저택의 여러 건물 중 서청을 정전으로 사용했답니다. 이후 서청은 영조대에 이르러 즉조당으로 불리게 돼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시대는 열강의 침략과 수탈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조선 말기로 넘어가게 돼요.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을 뒤로 하고 청과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명성황후를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은 자객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 189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에요.


이 사건으로 일본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친일내각을 타도하고 친러파 정부를 구성했어요. 하지만 일본의 압력이 커지자 고종은 다시 환궁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고종은 일본의 위협때문에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수립했답니다. 그때 천지에 제를 올리고 대한제국이 자주국임을 선포한 곳이 바로 이곳, 즉조당이에요. 고종은 덕수궁에 중화전을 짓기 전까지 즉조당을 법전으로 삼고 신하들로부터 하례를 받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했어요. 또, 중화전을 지은 이후에도 고종은 이 건물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고 해요. 하지만 이곳 즉조당 또한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어요. 당시 고종은 유서 깊은 즉조당의 소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해요. 현재 남은 즉조당은 소실된 후로 다시 재건한 건물이에요.



 

 


다음으로 소개해드릴 곳은 석어당이에요. 이 건물 또한 1904년의 화재로 본래의 건물은 불타고, 1904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랍니다. 석어당은 덕수궁 내의 유일한 중층건물이에요. 과거 석어당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했던 곳이에요. 하지만 선조의 뒤를 따라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를 이곳에 유폐했어요. 적자가 아니라는 점과 대비의 적통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으로서는 그대로 둘 수 없는 위험요소였는데요, 때문에 광해군은 후에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서인했답니다. 경인궁(당시 덕수궁의 이름)이란 이름 또한 서궁으로 낮춰 부르게 했어요.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까지 인목대비는 이곳에 갇혀 아들과 친정 혈육들이 광해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그저 볼 수밖에 없었는데요, 인조반정이 일어난 다음날 그녀는 석어당 마당에 광해군을 꿇어앉히고 그가 재위 기간 동안 지은 36가지의 죄를 물었어요. 그러면서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인(廢人)은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러 하늘에 죄를 진 자이니, 폐주(廢主)라고도 부르지도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해요. 인목대비의 분노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에요.







다음으로 소개해드릴 곳은 중화전 동쪽에 위치한 덕홍전이에요. 지금의 덕홍전 자리에는 본래 명성왕후의 혼을 모시는 혼전인 경효전이 자리잡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경운궁에 큰 불이 일어나면서 명성황후의 신주는 수풍당으로 옮겨 봉안했어요. 후에 고종황제는 경효전 터에 이전과 같은 건물을 다시 건립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압력으로 명성황후의 신주를 옮기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일본은 이곳을 고종이 일본 관리를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하게 했고, 이름 또한 덕홍전이라 불렀답니다.







다음으로 소개해드릴 건물은 석조전이에요. 석조전은 덕수궁 안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석조건물로 1900년 착공해 10년만인 1910년 완성되었어요. 석조전은 본래 고종의 처소와 사무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한 공간이에요. 조선의 다른 궁궐이 침전과 정전으로 분리되어 있던 것과 달리 석조전은 두 가지 기능이 모두 통합된 건물이었어요. 지층은 상궁처소·주방과 같은 시종들의 준비공간이었으며, 1층은 접견실·귀빈실·홀 등 업무용 공간, 2층은 침실·욕실 등 황제의 사적 공간이었답니다. 하지만 석조전 준공 당시에는 이미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고종은 이를 황제국의 궁궐로 사용할 수 없었어요.


많은 이들이 고종을 무능력하고 유약한 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로 근대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했고, 한계가 있을지언정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대한제국 헌법을 공포하는 한편 1900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석해 대한제국을 국제사회에 알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어요. 하지만 일제의 수탈과 압력으로 고종의 개혁과 독자적인 근대화는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답니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는데요, 이때에도 고종은 버틸 수 있는 한 끝까지 이 조약을 거부했어요. 이후 1907년 헤이그 밀사를 통해 대한제국의 실정과 일제의 수탈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다 이 사건으로 강제로 퇴위 당해 태상황으로 물러나게 되었답니다. 때문에 석조전 또한 황제의 궁으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죠.







이후 고종은 홀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지냈다고 해요. 함녕전은 고종 황제가 거처하던 침소였어요.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뒤, 고종은 황후를 평생 동안 그리며 재혼을 하지 않았어요. 나라를 잃은 왕은 함녕전에 머물며 늘그막에 얻은 늦둥이 덕혜옹주의 재롱을 작은 낙으로 삼고 지냈다고 해요. 이후 고종은 1919년, 이곳 함녕전에서 향년 67세로 승하했어요.



이렇게 덕수궁의 여러 건물들을 둘러보면서 그 속에 얽힌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렸는데 잘 살펴보셨나요? 마지막으로, 덕수궁(德壽宮)이라는 이름은 고종이 퇴위된 후, 순종이 아버지인 고종을 위로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덕수(德壽)라는 칭호를 내리면서 그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에요. 몇 채 남지 않은 덕수궁의 건물에는 이처럼 임진왜란 시절부터 구한말,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꿈과 좌절, 아픔이 묻어 있어요. 이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한 장면인 만큼, 아이들과 덕수궁을 찾는다면 이곳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세요. 혹은 시간을 맞춰 덕수궁이나 석조전 관람 해설을 이용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