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아름다운 4월인데요^^ 4월이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건이 있어요. 바로 4·19혁명이에요.
4·19혁명은 한국역사공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민주화 운동으로, 시민들의 많은 희생이 따른 가슴 아픈 역사이기도 한데요. 이러한 4·19혁명 원인과 결과는 무엇일까요? 4·19혁명 기념일을 맞아 대교와 함께 4·19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한국역사공부에서 아주 중요한 4·19혁명은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발생한 일련의 반정부(反政府) 항쟁이에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종신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으로 각종 정치적 비리를 저질렀어요. 이승만의 대표적인 부패정치로는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과 3·15 부정선거가 있는데요.
1954년 이승만은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의 중임 제한 조항을 없애는 개헌을 단행하였어요. 당시 개헌안 가결을 위해서는 재적 국회의원의 2/3에 해당하는 136표 이상의 찬성을 얻었어야 하는데요. 135표에 그쳐 부결되자 다음날 재적의원 2/3은 '135.333…'명이므로 이를 사사오입하면 135명이라고 하면서 가결처리 하며 '사사오입개헌'이라는 기상천외한 일을 단행했어요.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부패는 1960년 3월 부정선거에서 절정을 이루었어요.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분석한 결과 자유당 정권의 승산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자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 총계를 조작하는 등 많은 공무원들을 동원하였어요. 결국 이승만이 밀어주던 후보자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자 전국에 걸쳐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이승만의 독재는 결국 민주학생들의 의거로 이어져 4월 19일 민주항쟁이 발생하게 돼요. 특히 한국역사공부 중 3·15 마산의거는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4월 초 이승만 정부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들에게 무력진압을 단행했고, 여기에 총에 맞은 채로 해변가에서 김주열의 사체가 발견되자 마산의거는 전국적으로 퍼져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승만은 마산의거에도 불구하고 무력진압을 계속하였고, 결국 4월 19일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시위에 가담하게 되었어요.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 300여 명이 모여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나서게 돼요. 결국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이승만 정권 또한 붕괴되었어요.
4·19혁명은 우리나라 최초로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독재정권을 교체한 큰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어요. 어떠한 정권도 국민의 신망을 받지 못하면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해요.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오늘 함께 한 한국역사공부 시간이었던 민주주의의 시작인 4·19혁명은 꼭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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