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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금요일에 떠나요

[오늘의 세상] 엄마가 알려주는 우리 역사 이야기 - 6.25전쟁과 전쟁기념관

 

DAEKYO 오늘의 세상

 

엄마가 알려주는 우리 역사 이야기

6.25 전쟁과 전쟁기념관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10, 20대 청소년과 청년 10명 중 6명이 6.25한국전쟁이 언제 발발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느 나라와의 전쟁인지 조차 모르는 젊은 층도 꽤 된다고 하는데요.

동종상잔의 비극인 6.25한국전쟁에 대해 알아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봅시다.

 

 

 

 

대교 오늘의 세상

  6.25전쟁에 대하여 

 

 

 

  6.25전쟁의 발발 배경

 

 

 

 

1945년 8월 15일 미국과 지금의 러시아와 그 주변국가인 소련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독립을 했습니다. 너도나도 만세를 부르며 독립에 대한 기쁨을 나누었는데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미국과 소련이 우리 나라를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체제를 확립하고 세력을 넓혀가던 시기였고, 위치상 자신들의 체제를 넓히고 일본을 감시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 나라가 적합했기 때문에 남과 북으로 갈라버렸습니다. 이 후, 1949년 남쪽에 있던 미군은 철수를 했지만, 북쪽은 소련에게서 군수물자를 지원받으며 천천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가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고요한 남한을 무력으로 침범해 들어왔습니다.

 

 

  

  6.25전쟁의 과정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소련에서 지원 받은 무기들을 앞세워 38도선을 무단을 넘어왔습니다. 

국군의 후퇴

대전, 호남, 대구를 거쳐 낙동강가지 진출한 북한군을 피해 국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였고,

최후의 방어선으로 낙동강을 지킵니다.

UN군 파병

전쟁 직후 도움을 요청했던 UN군이 도착하고 전세는 역전됩니다.

인천 상륙 작전

맥아더 장군의 지휘에 따라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이 실시되고 이 것을 계기로 반격에 나서게 됩니다.

서울 수복과 북진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뺏긴지 3개월 만에 서울을 다시 찾고, 평양,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출합니다.

중공군 개입

많은 수의 병력으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공격하는 인해 전술을 사용하는 중공군이 불법 개입하면서

국군은 다시 밀리기 시작합니다.

1.4 후퇴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불리해진 국군은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주게 됩니다.

휴전 협정 체결

이 후, 38도선 부든에서 막상막하로 싸우던 국군과 북한군은

1953년 7월 27일, 종전이 아닌 휴전을 하면서 지금까지도 분단된 국가로 살고 있습니다.

 

 

 

  6.25전쟁의 결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고,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습니다.

또, 소중히 지켜온 궁궐, 탑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손실을 입었습니다. 집과 부모님을 잃고 거리를 떠돌며 동냥을 하는 전쟁 고아가 넘쳐났고,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해 울부짖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 후, 몇 번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지만, 아직도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대교 오늘의 세상

 전쟁기념관에서 본 6.25전쟁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 많은 아버지, 형, 오빠, 동생, 삼촌들 중 아직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많고, 아직 수습되지 못한 용사들의 유해가 13만여 위에 달한다고 합니다. 현재 국방부에서 유해발굴 감식단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전사자와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고 당시 세대의 증언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증언을 해줄 수 있는 분들이 돌아가시고 많이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국토 개발로 인해 지형이 변해 당시 전투 현장이 훼손되면서 더욱 더 유해발굴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해발굴 감식단의 노력 끝에 2010년 10월 말, 강원도 양구군에서 발굴한 이천우 이등중사의 유해가 60여 년 만에 형인 이만우 하사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전쟁기념관에서 이때의 모습을 재현해 전시하고 있는데요. 전시품이 어쩐지 으스스하면서도 마음 한 켠이 아파옵니다.

 

 

 

   학도병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적과 싸우는 의용병을 말하는 학도병은 6.25전쟁 당시 매우 큰 활약을 했습니다. 연필과 종이를 놓고 맞지 않는 군복을 입고 겨우 총을 다루는 법만 배우고는 전쟁터로 향했을 그 들. 아직 어머니의 손길이 그립고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는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한 영화의 소재로도 쓰였던 포항여중에서 북한군들의 사투를 벌였던 학도병 이우근 학도병이 전쟁 중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UN군 참전 용사

 

 

  

 

 

와 본적도,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전쟁에서도 싸우고 또 싸우던 미국을 포함한 10여 개의 국가들.

자신의 나라도 아닌 머나먼 타국에서 숨을 거뒀을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와 그들의 이름 앞에 놓여진 국화꽃을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그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전쟁기념관 추모비 앞 쪽 벽에 새겨진 말처럼 전쟁의 승패가 그들 개인의 이익과는 상관없지만, 목숨을 걸고 우리 나라를 지켜준 UN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우리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현재에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분단 국가로 남아있습니다.

현재 우리와 북한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입니다. 말 그래도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쉬고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가 적이 되어 총 뿌리를 겨누는 1950년 6월 25일의 악몽과 같은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라나는 젊은 세대가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그 의미를 되새겨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젊은 세대 중 대부분은 6.25 전쟁이 언제, 왜 일어났는지, 누구와의 전쟁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니 씁쓸합니다.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에 나오는 이야기, 할머니가 해주시는 옛날 이야기, 그냥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겪고 힘들어하시고 아파하셨던 민족간의 전쟁이 6.25전쟁입니다.

이러한 6.25전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